RCPS로 받은 100억, K-IFRS에서는 부채입니다 — 회사가 잘될수록 손실이 커지는 역설

시리즈B 클로징 보도자료에는 “100억 투자 유치”라고 적습니다. 그런데 1~2년 뒤 IPO를 준비하며 받아든 K-IFRS 전환 검토보고서에는 같은 돈이 부채 100억으로 앉아 있습니다. 누가 잘못 처리한 게 아닙니다. 둘 다 맞습니다 — 기준이 다를 뿐. 문제는 이 간극을 상장 직전에 발견하면 손쓸 카드가 거의 남아 있지 않다는 점입니다.

💡 한 줄 요약 — 스타트업 투자의 표준 수단인 RCPS(상환전환우선주)는 K-GAAP에서 자본이지만, K-IFRS에서는 대부분 부채로 재분류됩니다. 투자자가 쥔 상환권이 주계약을 금융부채로, 가격보장형 리픽싱 조항이 전환권을 파생상품부채로 만들기 때문입니다. 부채비율 급등은 시작이고, 기업가치가 오를수록 전환권 평가손실이 커져 영업 흑자 회사가 순손실을 내는 역설로 이어집니다. 분류를 가르는 문구는 전부 텀시트 단계에 확정됩니다. 대응도 그때 해야 합니다.


같은 주식이 자본도 되고 부채도 되는 이유

K-GAAP(일반기업회계기준)은 법적 형식을 따릅니다. 상법상 우선주는 주식이고, 주식 발행 대금은 자본입니다. RCPS 100억을 받으면 우선주자본금과 주식발행초과금으로 나눠 적으면 끝. 비상장 성장기업 대부분이 K-GAAP을 쓰니, 시리즈 A부터 C까지 RCPS를 쌓아온 회사의 재무상태표에서 투자금은 전부 자본 안에 있습니다.

K-IFRS 제1032호(금융상품: 표시)는 명칭이 아니라 계약의 실질을 봅니다. 회사가 현금 지급을 피할 수 없는 계약상 의무를 졌다면, 그 이름이 ‘주식’이어도 부채입니다. 국내 RCPS 표준 계약은 투자자가 상환권을 쥡니다 — 일정 기간이 지나면 원금에 연복리 보장수익률을 얹어 돌려달라고 청구할 수 있는 권리. 회사가 상환을 피할 수 없으므로 주계약은 금융부채가 됩니다. 실질이 ‘조기상환 조항 붙은 사채’에 가깝다고 보는 겁니다. 상환권을 회사가 쥐는 예외적 설계라야 자본 분류를 검토할 여지가 생깁니다.

실무에서 대표나 CFO가 가장 납득하기 어려워하는 대목이 여기입니다. 상법 제345조는 상환주식의 상환 재원을 “회사의 이익”으로 묶어둡니다 — 배당가능이익이 없으면 투자자가 상환을 청구해도 회사는 법적으로 갚을 수 없습니다. 누적 결손인 성장 스타트업이 대부분 그렇죠. 그러니까 상법은 못 갚게 막아둔 돈을, 회계는 갚아야 할 돈이라고 부르는 셈입니다. K-IFRS의 논리는 간명합니다. 의무가 존재하는지와 지금 이행할 수 있는지는 별개라는 것.

숫자로 보면 체감이 됩니다. 총자산 150억, 기존 부채 30억, 자본 20억인 회사가 RCPS 100억을 유치했다고 합시다(주계약 70억 + 전환권 30억으로 분리 인식 가정). K-GAAP 재무상태표는 부채 30억, 자본 120억 — 부채비율 25%. 같은 회사를 K-IFRS로 옮기면 부채 130억, 자본 20억 — 부채비율 650%. 영업은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는데 말입니다.

K-GAAP과 K-IFRS의 RCPS 분류 비교 — 부채비율 25%에서 650%로
같은 회사, 같은 계약 — 기준만 바꿨을 뿐인데 부채비율이 25%에서 650%가 된다

상환권이 투자자 손에 있는 순간, 그 우선주는 회계적으로 빚입니다. 분류를 결정하는 건 회사의 실적이 아니라 계약서 문구입니다.

부채 분류의 후폭풍은 재무상태표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부채로 분류된 상환우선주의 누적적 배당은 배당 결의를 하지 않아도 이자비용으로 손익에 쌓입니다. 보장수익률 연 5%라면 첫해 약 3.5억(주계약 70억 기준) — 유효이자율법이라 해마다 불어납니다. 배당을 한 번도 한 적 없는 회사 손익계산서에 이자비용이 앉는 겁니다.


‘리픽싱’이라는 같은 이름, 다른 운명

전환권 차례입니다. K-IFRS에서 전환권이 자본이 되려면 ‘확정 수량의 주식을 확정 금액과 교환’하는 조건이어야 합니다(이른바 fixed-for-fixed). 전환으로 나갈 주식 수가 변할 수 있는 계약이라면 자본이 아닙니다.

RCPS 계약서의 전환가격 조정(리픽싱) 조항이 여기서 갈립니다. 두 부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희석방지형입니다. 주식분할·병합·무상증자가 있으면 같은 비율로 전환가격을 조정한다는 류 — 주식 수가 변해도 기존 전환비율을 그대로 유지하려는 기계적 조정이라, 확정 대 확정 요건을 깨지 않는 것으로 봅니다.

다른 하나는 가격보장형입니다. 다음 라운드가 더 낮은 가치로 진행되면 전환가격을 끌어내리는 다운라운드 보호, IPO 공모가가 일정 수준을 밑돌면 조정하는 조항, 일정 기간 평균 주가가 하락하면 하향하는 조항. 이건 비율 유지가 아니라 투자자 수익 보장입니다. 전환될 주식 수가 회사 가치에 따라 늘어나므로 확정 대 확정이 깨지고, 전환권은 K-IFRS 제1109호에 따라 주계약에서 분리되어 파생상품부채가 됩니다. 매 결산마다 공정가치로 다시 재고, 변동분은 그대로 당기손익입니다.

함정은 계약서에서 이 둘이 같은 제목 아래 나란히 산다는 점입니다. ‘전환가격의 조정’ 조항 안에 ①항은 희석방지, ②항은 가격보장 — 항 하나 차이로 자본과 부채가 갈리는데, 서명 단계에서 이 차이를 짚는 눈은 법무 실사에도 재무 실사에도 의외로 드뭅니다. 그리고 국내 RCPS 계약에는 리픽싱 조항이 거의 빠지지 않고, 그 안에 가격보장형이 끼어 있는 경우가 흔합니다.


회사가 잘될수록 손실이 커집니다

파생상품부채가 된 전환권의 공정가치는 보통주 가치의 함수입니다. 기업가치가 오르면 같은 전환가격으로 더 비싼 주식을 받을 수 있으니 전환권 가치가 뜁니다. 부채가 커진 만큼이 평가손실 — 당기손익 직행입니다.

앞의 예시를 이어가면, 발행 시점에 30억으로 인식한 전환권이 1년 뒤 기업가치가 500억에서 1,000억으로 뛰면서 80억이 됐다고 합시다. 차액 50억이 그 해 파생상품 평가손실입니다. 영업에서 20억을 벌었어도 당기순손실 30억. 사업이 계획대로 굴러갈수록 손익계산서는 나빠지는 구조입니다.

기업가치 상승에 따른 전환권 파생상품부채 평가손실 발생 구조
전환권 평가손실 50억 — 기업가치가 두 배가 된 대가

한때 뉴스에 오르내린 유니콘들의 “조 단위 적자” 가운데 상당수가 이 항목입니다. 영업적자가 아니라 전환우선주·전환사채 평가손실이 순손실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결산 — 기업가치가 올랐다는 신호가 손실로 인쇄되는 역설이죠. 거꾸로 다운라운드를 맞으면 전환권 가치가 줄어 평가이익이 잡힙니다. 회사가 어려워졌는데 순이익이 나는, 반대 방향의 역설도 성립합니다.

전환권 평가손실은 실패의 기록이 아니라 기업가치 상승의 그림자입니다. 문제는 당신 회사의 숫자를 읽는 모두가 그걸 아는 건 아니라는 점입니다.

이 ‘읽는 법’을 아는 상대는 웃어넘깁니다. VC 심사역과 IFRS에 익숙한 기관투자자가 그렇습니다. 그런데 회사의 숫자는 그들만 보는 게 아닙니다. 은행 여신심사, 정책자금 신청, 입찰 참가 자격, 보증기관 심사는 부채비율과 당기순손실을 모델에 그대로 넣습니다. 주석에 ‘전환권 평가손실’이라고 또박또박 적어도 스코어링은 숫자만 읽습니다. IFRS 전환 후 첫 결산을 앞둔 CFO의 할 일 목록에 ‘재무비율 악화에 대한 대외 설명 시나리오’가 들어가야 하는 이유입니다.


분류는 텀시트에서 이미 결정됩니다

여기까지 읽으면 상장 준비 단계의 회계 이슈처럼 보이지만, 당길 수 있는 레버는 대부분 계약 단계에 있습니다.

첫째, 상환권부터 따져볼 일입니다. 투자자에게 상환권은 실제로 행사하려는 권리라기보다 다운사이드 방어와 협상 지렛대입니다. 결손 법인은 어차피 상법 제345조 때문에 상환 재원도 없습니다. 그래서 협상 테이블에서 상환권을 뺀 CPS(전환우선주)로 합의되는 라운드가 적지 않습니다. 상환 의무가 없는 CPS는 상품 전체를 하나의 지분상품으로 보아 자본으로 남길 여지가 큽니다 — 자동은 아니고, 조항 전체를 놓고 판단할 문제입니다만, 출발점이 다릅니다.

둘째, 리픽싱 조항을 분해해서 읽어야 합니다. 희석방지형만 남기고 가격보장형을 덜어낼 수 있다면 전환권의 자본 분류 여지가 살아납니다. 투자자가 양보하지 않더라도, 그 조항이 파생상품부채와 손익 변동성을 만든다는 걸 알고 서명하는 것과 모르고 서명하는 것은 이후 3년의 재무 전략이 다릅니다.

셋째, K-IFRS 전환 시뮬레이션은 상장 결심보다 먼저여야 합니다. 상장 심사에는 통상 최근 3개 사업연도의 K-IFRS 재무제표가 들어갑니다. 2029년 상장이 목표라면 2026년 장부부터 K-IFRS로 다시 써야 한다는 뜻입니다. “상장 준비할 때 보면 되지”의 ‘그때’는 이미 소급 대상 연도가 지나간 뒤입니다.

넷째, 해소 경로는 셋입니다. 보통주로 전환하거나, 변경계약으로 상환권을 떼어내거나, 드물게 상환하거나. 투자자도 결국 IPO로 회수하는 게 목적이라 상장이 가시화되면 협상이 됩니다. 실제로 상장 전에 RCPS를 보통주 전환 등으로 정리하고 들어가는 게 일반적인 수순입니다.

다섯째, 비용도 셈에 넣어야 합니다. 전환권이 파생상품부채로 분류되면 매 결산마다 기업가치 평가와 옵션평가모형 계산이 필요합니다. 외부 평가 수수료에 감사 대응까지, RCPS 한 건이 만드는 연례 고정비가 생각보다 큽니다.

투자 계약서는 법률 문서이기 전에 회계 문서입니다. 변호사는 조항의 권리·의무를 읽지만, 그 조항이 3년 뒤 재무제표 어느 줄에 어떤 부호로 앉을지는 회계의 영역입니다. 다음 라운드 텀시트를 받았다면 서명 전에 두 가지만 확인하십시오. 상환권이 누구 손에 있는지, 그리고 리픽싱 조항에 ‘가격’이 들어 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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